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트린 드 메디시스 (문단 편집) === 왕권 강화를 위한 이간책과 위그노 탄압 === [[1559년]] [[7월]] [[앙리 2세]]가 마상 창시합 도중 죽은 후[* 이걸 예언[[카더라|했다며]] 유명해진 인물이 [[노스트라다무스]]이다.]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세 차례에 걸쳐[* [[프랑수아 2세]](1559~1560), [[샤를 9세]](1560~1574), [[앙리 3세]](1574~1589)] 왕의 그림자 뒤에서 프랑스 정치를 주름잡는 실세가 되었다. 그리고 '''이 과부가 다스리는 30년은 프랑스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로 기억된다'''('''[[위그노 전쟁]]'''). 어렵게 섭정 [[왕태후]]의 지위를 얻었으나, 당시 [[프랑스]]는 [[위그노 전쟁|신/구교간의 갈등]]으로 내전 상태였고, 어린 아들 [[프랑수아 2세]]의 왕권도 기즈 가문[* [[프랑수아 1세]]는 왕세자 부부에게 유언으로 '''"기즈 가문을 조심해라. 그들은 너희의 아이들의 조끼까지, 그리고 너희의 백성들의 셔츠까지 몽땅 벗겨갈 것이다."'''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남겼다.]에 의해 흔들리는 처지였다. [[프랑수아 2세]]의 왕비이자 [[스코틀랜드]]의 여왕이었던 [[메리 1세(스코틀랜드)|메리 스튜어트]]의 외가 역시 기즈 가문인지라 그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. 따라서 카트린은 [[발루아 왕조]]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구교도간의 갈등을 적극 이용했다. 프랑수아 2세 즉위 당시 벌어진 [[위그노]]([[개신교]])들의 국왕 납치 시도 사건('''앙부아즈의 음모 사건''')의 주모자격인 콩데 공작을 사면해 [[가톨릭]]의 대표인 기즈 가문을 견제했다. 그러는 동안 워낙 병약했던 [[프랑수아 2세]]는 즉위 16개월만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승하했다. [[메리 스튜어트]]는 왕권을 찾아 [[스코틀랜드]]로 떠났고, 카트린은 장남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차남 [[샤를 9세]]를 대신해 섭정하게 된다. 카트린은 [[가톨릭]]에서 [[개신교]]로 이반하여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는 [[샤를 9세]]를 설득하고, 개신교도라면 이를 가는 기즈 가문과 연합하여 샤를 9세와 협력관계이던 개신교도[* 대표적으로 당시 개신교도의 수장이었던 [[프랑스 해군]] 제독 가스파르 드 콜리니.]들에 대한 암살계획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있다. 카트린이 연루되었든 그렇지 않든 이 암살로 인해 촉발된 일이 바로 '''[[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]]'''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사건이었다. 다만 카트린 자신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제외하면, 화합의 아이콘이 될 미셸 드 로스피탈을 수상으로 임명하고, 딸 [[발루아의 마르그리트]]('마르고' 또는 '마고')와 [[위그노]]인 앙리 나바르(훗날의 '대왕' [[앙리 4세]])를 혼인시켰을 정도로 위그노와 [[가톨릭]]의 화합을 꿈꾼 인물이었다. 그녀가 가장 아낀 아들은 [[앙리 3세]]였다. 외모도 뛰어난 데다가 어릴 때는 상당히 총명하여 그녀가 가장 기대한 아들이기도 했다. 하지만 정작 즉위한 후 그는 총신들과 놀아재끼기에 바빴고, 어머니인 카트린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. 그 중 가장 결정판이라 할 만한 것은 앙리 3세의 기즈 공작 암살이라고 할 수 있는데, 카트린이 암살 전에 이걸 인지했다는 주장도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